노정태 | 칼럼니스트
정의되지 않은 정의(正義)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강자와 약자 모두 동의하고 승복할 수 있는 공통의 규칙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의란 한낱 강자의 횡포를 치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말하는 ‘정의사회구현’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표방하는 ‘정의’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비단 정의뿐만이 아니다. 모든 ‘좋은 개념’들은 그것이 갖는 영향력만큼이나 위험성을 지닌다. 특히 최근에는 모든 이념들을 밀쳐내고 이데올로기의 왕좌에 군림하게 된 ‘경제’가 문제가 된다.
47세의 젊은 대통령 후보, 아칸소 출신 촌놈이지만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폭발적인 대중 친화력을 지녔던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터뜨렸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어 90%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던 아버지 부시(H. W. Bush)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문제는 이 ‘경제’가 대체 어떤 경제냐 하는 것이다. 당시 클린턴 후보 측 선거 전략가였던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은 미국 경제가 불경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측이 경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아군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카빌은 리틀록에 위치한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에 세 가지 사항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1. 변화 vs.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2.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3. 의료보험을 잊지 말자
이것은 엄연히 ‘내부용’ 구호였지만, 어느새 선거운동본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빌 클린턴을 미합중국의 42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3번 구호에 주목해야 한다. 오바마 또한 의료보험 문제를 놓고 정치적 자산을 건 큰 싸움을 진행 중이다. 단지 불황에서 벗어나는 것, 경기 부양책을 써서 실업률을 낮추고 GDP를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명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와 함께 리틀록의 선거운동 본부에 내걸려 있었던 것이다.
경제주의, 삽자루 쥔 사람이 이기게 되어먹은 싸움
그리고 10여 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들이 클린턴의 저 성공적인 선거구호를 흉내낸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이명박 후보가 2007년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고, ‘이명박 반대’만을 내세우던 이른바 ‘개혁 진영’은 혹독한 패배를 겪어야 했다. 이제 정치의 모든 내용을 경제가 압도하고 있다. 소속 정당이 다르다 뿐이지 모든 정치인이 탈이념을 표방하고 실용적으로 ‘친서민’ 경제 정책을 펼치겠다는 내용만을 반복한다. 모두가 ‘문제는 경제’라고 소리지르며 서로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바보 같은 형국이다.
정말 충격적이고 두려운 것은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야당들의 대응이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친 서민적인가? 이명박 정부의 친 서민 정책은 과연 친 서민 정책인가? 이런 공허한 개념 싸움을 벌이는 사이, 이미 삽질은 시작되었고 콩고물, 아니 세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시루떡이 건설족들의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가게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야당들은 외친다. 이명박 정부는 친서민 정부가 아니며, 삽질 경제가 아니라 진짜 서민 경제를 해야 한다고. 우리가 그것을 보여 드리겠노라고. 아직도, ‘문제는 경제’라고.
그런데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다. 클린턴이 말하던 ‘경제’는 경기 부양과 함께 사회 복지체계를 갖추어나가는 그런 경제였다. 그러나 여기는 대한민국이며 ‘경제’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금융, 경제, 기업, 법률, 교육, 문화 등 모든 자원이 오직 수도 서울에만 집중된다. 이른바 ‘지역 감정’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정치적 다툼은, 이렇듯 수도 서울에 집중된 자원을 각 지역 출신의 엘리트들끼리 어떻게 분점하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새만금사업을 되돌릴 수 없었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이지만, 철회하는 순간 호남표가 우수수 떨어진다. 호남표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모든 호남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으며, (현재의 ‘경제’ 구조를 놓고 볼 때) 그게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대강 정비, 대운하 등 거대한 토목공사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경제야’라는 주문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그런 거대한 토목공사의 물결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공론장에서 통용되는 ‘경제’란, 토목공사를 벌여 떨어지는 콩고물을 그 지역 주민들이 (낙수효과에 따라) 나눠먹음으로써 집값을 올리고 경기를 부양하는 그런 것을 뜻할 뿐이다. 다른 이슈들은 아무리 중요한 것일지라도, 가령 국영탁아소를 대폭 증설함으로써 여성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정책 등이 제안된다면, 그것은 ‘복지’에 속하지 결코 ‘경제’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경제’와 미국의 ‘경제’는 같은 시니피앙을 공유하고 있으나 사뭇 다른 시니피에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가 경제 타령으로 이겼나?
재보선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세종시를 둘러싼 한나라당의 내분이 격화되고 있고(이것도 결국 ‘경제’ 문제로만 귀착되는 모습을 보인다), 3석을 얻은 민주당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말하면서도 표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진보정당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국민참여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친노신당이 출범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사표론’이니 ‘차악론’이니 ‘이번 한 번만 표를 빌려줍쇼’ 같은 소리를 또 듣게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정치 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경제야’의 망령은 여전하다. 민주당과 친노신당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아야 진정한 ‘친서민 경제’를 펼칠 수 있고 한나라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수 정치권을 비판하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민생 대안’을 내놓지만, 그것들을 포괄할 수 있을만한 어떤 비전을 유권자들에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주의라는 이념 외의 그 어떤 이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의 정치 풍토가 그러한 비극을 낳고 있는 것이다.
‘경제’라는 단어가 토목공사를 통한 하향식(Top-down)의 자원 분배만을 뜻하는 한, ‘문제는 경제야’에 매달려 있는 야당들은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 정치라는 거대한 게임 자체가 경제라는 이름의 퍼주기 싸움으로 전락하는데, 여당은 정권을 쥐고 있으므로 야당에 비해 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니 말이다. 사분오열된 야당과 내홍에 시달린 여당의 정치공학적 움직임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이슈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번 재보선 이후의 정치를 생각한다면 ‘경제’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고, 동시에 한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주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이념적 포석을 구상해야 한다.
그놈의 경제 타령에 묶여있는 한, 누가 됐건 또 한나라당에서 정권을 가져가게 되어 있다. 삽자루 쥔 사람이 이기게 되어먹은 싸움이란 말이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십 년 전 선거 구호에 묶여 있는 정치가 문제다. 빌어먹을, 제발 업데이트 좀 하고 살자. 오바마가 경제 타령으로 이겼나?
2009.11.11 ⓒ 노정태
노정태 : 실업의 아픔을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이겨내고 있는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전 편집장.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한 권의 단행본 번역, 두 권의 단행본 저술과 함께 칸트에 대한 석사 논문을 준비하거나 진행하고 있으며, 《경향신문》과 《미디어스》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칼럼니스트
2000년대 들어 일본 서브컬처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경향 하나를 꼽자면, ‘세카이(セカイ系=세계) 계’라 불리는 작품들이 나타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 다카하시 신의 만화 <최종병기 그녀>, 그리고 아키야마 미즈히토의 소설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 그 대표적인 작품인데, 이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추리소설가이자 미스터리 평론가인 고모리 겐타로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거론한다.
・히로인과 연애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 자신은 싸우지 않고 그녀와 순애보를 펼친다.
・큰 상황(세계의 존망)과 작은 상황(주인공들의 연애)이 직접 결부되어 있고, 중간 사회 영역의 묘사가 스킵된다.
・전쟁은 적의 격파와 승리에 이르지 않으며, 과감히 갈라보자면 불리한 상태 혹은 파멸에 이르며, 연애 이야기에 비장(悲壯)함이나 안타까움을 가져온다.
・종래는 공통적인 가치관으로 믿어지던 ‘정의’나 ‘우정’은 이제 공유되지 않는다.
_고모리 겐타로, 「세카이 계 작품의 진화와 퇴락」(고정수 옮김)
위 특징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세 번째, 즉 ‘큰 상황과 작은 상황의 직결’일 것이다. 예를 들어 2009년 7월에 출시된 세카이 계 작품 연구서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세카이 계 문화론』(한계소설연구회 펴냄) 서문에는 ‘세카이 계’란, ‘남자 주인공과 히로인의 이자(二者)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일상성(너와 나)의 문제와 '세계의 위기', '이 생의 종언'이라는 추상적이자 비일상적인 큰 문제가 구체적(사회적)인 문맥(중간항, 中間項)이 개입되지 않은 채 직결되는 작품들’이라고 정의한다.
이 세계의 존망보다 연애가 급하다?
이 ‘사회적 중간항의 소실’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철학자의 밀실』을 비롯한 철학적인 추리소설로 잘 알려진 가사이 기요시다. 비평가로서의 얼굴도 갖고 있는 그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수록된 논문 「세카이 계와 예외 상황」에서 “세카이 계에서 소실된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서 고찰한다.
가사이에 따르면 세카이 계 작품에서 삭제된 ‘사회’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들이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성인이 됨으로 도달해야 하는 근대 사회’다. 세카이 계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간주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 신지는 아버지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에 자폐하는데, 가사이는 그 뒤에 현대 사회에 있어서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에 의한 동형적· 동질적 주체의 세대적 재생산의 실종’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사회는 홉스가 말하는 사회계약 이전의 상태, 즉 폭력적인 혼탁한 공간으로 회귀할 거라고 말한다. 세카이 계 작품에서 세계를 파멸시키는 ‘적’의 정체성이 애매한 채 이야기가 끝나고 마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 이리야는 정체불명의 적에 대처하는 국가적 음모에 말려들고, <최종병기 그녀>에서 히로인은 저항할 수 없는 국가 의사에 의해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둘째는 20세기 후반에 성립된 복지사회다. 80년대에 경제적 번영을 누린 일본은 90년대 초 버블이 붕괴하고부터 미증유의 불경기에 빠졌다. 2001년에 성립된 고이즈미 정권은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성역 없는 구조개혁’을 내걸어 여러 분야에서 ‘고통이 따르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게 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사회적 격차가 확대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세카이 계 작품에서 소실된 ‘사회’를 둘러싼 가사이의 고찰에는 날카로운 지적이 많이 포함된 것 같다. 특이 버블 붕괴 후 사회 상황과 세카이 계 작품 속 모습이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므로 90년대부터 세카이 계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한 2000년대 초까지 일본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책『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한다』에서 시도한 분석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민주당 정권에 기대하지 말기
가라타니에 따르면 1990년대에 일본에서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고, 2001년에 고이즈미가 총리가 되기 전에 일본 신자유주의 체제는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 국유철도가 민영화함으로써 국유철도노동조합을 해체시키고, 일교조(일본교직원조합)를 탄압함으로써 교육 통제가 진행되고, 공명당을 연립정권에 더함으로써 일본 최대의 종교단체인 창가학회를 구워삶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인 부락해방동맹을 제압했다. 그런 식으로 2001년에는 여태까지 정부 정책에 대항하는 기능을 수행해온 소위 ‘중간 세력’이 거의 전멸되어버렸다. 고이즈미 정권이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내 생각에 요컨대 세카이 계 작품에서 소실되었다고 여겨지는 ‘사회’란, 실은 그런 ‘중간 세력’이다. 90년대로부터 2000년대에 걸쳐 행해진 사회 개혁에 의해 일본 사람들은 정부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잃어 버렸다. 이제 일본 사람에게 남은 것은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 오랫동안 여당의 자리를 차지했던 자민당이 민주당에 패배한 배경에는 그런 상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되는 의회제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관료가 입안한 것을 국민 스스로 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기 위한 치밀한 절차”(가라타니 고진, 제3장 「투표와 선거」,『일본정신의 기원』,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2)인 이상, 민주당 정권에 많은 것을 기대하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지금 일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잃어버린 중간 세력 대신 새로운 시민운동을 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일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세카이 계 작품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사회의 소실’이란, 단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해도 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2009. 10.31 ⓒ 고정수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자란 100% 일본인. 2000년 말에 영화 <쉬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5년 《씨네21》에 <한 일본 사람 눈으로 보는 한국 영화>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의 문화 번역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 웹진 《매거진t》에 <나는 오사카 TV 오타쿠>를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1년에 두세 번 한국에 여행을 간다. 한국을 방문하여 블로그에서 알게 된 분들과 친교를 맺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한윤형 | 인터넷 논객
도덕성이라는 윤리적 잣대와 정통성이라는 정치적 잣대를 떠나서 순수하게 미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해보자. 대한민국 역사상 현임 대통령만큼 ‘매력’이 없는 대통령은 없었을 거다. 이는 이명박을 지지하든 안 하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나라당과 대립하면서 정치적 기회를 노리는 모든 정치 세력들에게 ‘반MB 전선’이라는 손쉬운 유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한나라당에 축복으로 작용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매력 없는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을 조직하여 반전을 꾀하는 시도는 한나라당 정부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최장집의 설명대로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너무 낮춰놓아 정부가 조금만 잘해도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반MB 전선’이라는 손쉬운 유혹의 아이러니
반MB 전선이나 민주 vs 반민주 전선이 무용함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많았다. ‘무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진리의 차원에서 오류라는 것이기 보다 유권자를 설득하는 정치의 차원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까지 반MB와 민주 vs 반민주 전선을 고수할 것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민주당 성향 정치인들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정치학자나 평론가들의 조언을 진리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받아들인 거다. 당신들 같은 먹물은 잘 모르지만 유권자들은 우리의 말에 반응할 거라는 식의 낙관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최장집은 옳고 민주당 정치인들은 틀렸다. 이런 민주당의 낙관주의는 2007년 대선 때부터 이어져오던 것이긴 하다. 말하자면 민주당은 국민이 어째서 민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선택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보지 못한 것이다.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선택한다는 명제는 타당하지만, 그런 식의 '국개론'이 정치 세력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는 ‘좋은’ 정치 세력을 선택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쁜’ 정치 세력을 심판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명박이 그렇게도 매력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도대체 어째서 그에게 정권을 빼앗겼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그 질문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나쁜’ 정치 세력이다. 문제는 이명박이 문제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다. 그 이유를 손쉽게 ‘매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여전히 정치는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사람들은 어떤 매도에도 불구하고 다음에도 한나라당을 찍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성찰을 하지 않으니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성찰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민주당 지지자나 노무현 지지자에게 그 ‘성찰’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물론 그 성찰이라는 것이 책임 떠넘기기는 아니다. 이 점을 확실하게 말해줘야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다. 대부분의 민주당-노무현 지지자들은 이 성찰론이 소위 노무현과 자신을 차별하고 싶었던 진보 진영의 자기 PR 담론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런 이유로 신경질을 낸다. 노무현 시대의 다툼에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현 상황의 무력함엔 좌파들의 책임 역시, 혹은 절대적으로 있음이 분명하다. 좌파의 책임을 벗어던지기 위해 성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좌파들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다행히 성찰을 시작한 지지자들이 있는 것 같다. 민주당은 개별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의 총합을 넘어선 ‘민주당 전체의 이해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할 정도의 정치 세력이 되고 말았지만, 지지층은 당연히 그 지점을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사IN》 107호에 실린 굽시니스트의 시사만화(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72) 를 보자. 이 만화에는 거창한 정치학적 분석이나 세밀한 정치 공학은 존재하지 않지만 한나라당과 경쟁해야 하는 민주당을 바라보는 ‘일반 유권자’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적어도 이 정도의 현실인식은 공유해야 다음 얘기를 할 수 있다.
친노신당, 이번 실험이 지난번과 다를 근거는?
재미있는 것은 굽시니스트의 만화의 마지막 컷이 겨냥하는 대상이 유시민이라는 점이다. 반MB 전선이 아니라 다른 제품으로 우리에게 어필해 보라고 주문하는 반-한나라당 정서의 ‘정치 소비자’ 굽시니스트의 ‘리콜 요구’가 향하는 대상은 다른 여느 정치인이 아니라 유시민이다. 이것은 이 사태에 해결의 단초를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이 그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소박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당위를 그에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엄중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굽시니스트는 유시민이 지금까지는 반MB 전선과 구별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친노신당이라는 기획은, 풀어서 설명해 보자고 한다면 민주당이 현재 당면한 문제를 당원민주주의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사람들에겐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치학적으로 따진다면 국가가 아닌 다른 집단의 경우 민주주의적 리더십만이 대안은 아니라는 최장집 등 정치학자의 지적도 새겨야겠지만, 유권자들의 수준에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성찰’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는 거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시민 등이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의 실험에서 이미 말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실험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거라는 전망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걸 떠나서 도대체 이번의 실험이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려면 지난번 실험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이며 이번 실험이 지난번과 다를 근거는 무엇인지 정도는 얘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노무현이라는 매력적인 개인의 영웅신화의 비극적인 결말이라는 서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차후를 꿈꾸는 정치인/세력이라면 마땅히 그 틀을 벗어나 자신들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2009.10.11 ⓒ 한윤형
한윤형 : 인터넷 논객. 고등학생 때 서울대와 《조선일보》 주최 논술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고서 안티조선운동의 참여자임을 밝히며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해 화제가 되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지면을 통해 글을 발표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공저), 『뉴라이트 사용후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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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세상을 보는 검은 눈, Skyjet | 2009/10/13 23:26 | DEL
요새 인터넷을 둘러보다보면 누리꾼들의 생각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이젠 다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를 외치면서 끝없는 절망을 외치는 사람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부 국개'라고 주장하면서 거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두 부류는 양극단에 놓여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같은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사람들이다. 작년의 촛불 집회로 인해서 모든 것이 전부 바뀔 줄 알았지만, 정부의 기민한 대응과 시민들의 행로가 엇갈리면서 촛불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