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꿀벅지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란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의미도 모호한 이 신조어를 성희롱으로 보는 견해와 ‘건강한 여성미’에 대한 예찬으로 보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이 말을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에 대해 여성부는 ‘특별한 조처’를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이 단어의 ‘유통’에 대한 ‘국가 페미니즘’의 대응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 것처럼 보인다.
정작 꿀벅지라는 기표의 지시대상이라고 할 여성들이 이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이 말을 통해 발생하는 효과가 ‘여성의 상품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에서 ‘국가 페미니즘’은 무기력증을 드러낸다.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따라 발현한다는 측면에서 이 현상은 단순한 해프닝의 차원을 넘어서서 모종의 구조 변동을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꿀벅지는 쾌락을 주는 증상이고, 또한 이 쾌락은 비판의 거리마저 무화시키는 강렬한 ‘중독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구별 짓기를 통해 탄생한 ‘다른’ 허벅지
명백하게 꿀벅지라는 말은 특정한 여성의 신체를 분리해서 이상화하고, 특화시킨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상품 구조를 통해 발생하는 ‘물화’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렇게 문제와 답이 자명하다고 해서 꿀벅지라는 용법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지적이 곧바로 대중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상품화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의 공유가 앞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꿀벅지라는 용어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대중의 합의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꿀벅지의 의미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소수의 입장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주장과 별도로 지금 현재 한국의 현실에 개입하려는 진보·좌파 담론의 처지와 관련해서 중요한 고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꿀벅지 용어 사용 금지에 대한 요청들이 이런 상품화의 메커니즘 바깥에서 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 요청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꿀벅지라는 말에 감춰져 있는 성적 대상화이다. 꿀벅지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은 성욕에 대한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금지에 대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꿀벅지라는 상품화의 메커니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런 금지가 과연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아버지의 법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금지는 자본주의를 불쾌한 것으로 만드는 외설적 욕망에 대한 금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꿀벅지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유포시키는 논리나, 그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논리는 동일한 욕망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꿀벅지 해프닝은 부박한 대중문화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현 단계와 연동하는 정치적 접점들을 폭로한다고 할 수가 있다. 미학적 감각은 정치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꿀벅지라는 합의의 기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코드와 이를 재생산하는 감각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꿀벅지라는 용어의 출현은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같은 틴에이저 아이돌 그룹에 대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선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한 젊은 여성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남성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남성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했을 때, 지금 현재 목격하고 있는 꿀벅지 논란이 가능하다.
그러나 꿀벅지 문제는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선 논의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꿀벅지의 쾌락을 용인하고, 그 이상의 욕망을 금지시키는 법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말하자면, 꿀벅지는 쾌락의 기표이면서 동시에 금지의 표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꿀벅지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넘어 진화한 욕망에 대한 금지의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소녀시대를 둘러싸고 일어난 ‘허벅지 예찬’과 이 현상은 무관하지 않다. 꿀벅지의 범주에 소녀시대의 일원인 티파니도 속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황은 더 명백해진다. 말하자면 꿀벅지는 허벅지 중에서도 뛰어난 허벅지를 뜻한다. 구별 짓기를 통해 탄생한 ‘다른’ 허벅지가 바로 꿀벅지이다. 이렇게 꿀벅지를 다른 허벅지와 구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건강미’라는 새로운 기준이다. 이 기준은 비만 주사까지 맞아가며 ‘예쁜 허벅지’를 만든 소녀시대의 ‘인공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꿀’처럼 달콤한 욕망 이상을 원하지 말라?
이런 의미에서 꿀벅지는 ‘소녀시대의 허벅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위한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소녀시대의 허벅지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인공적인 성형수술이다. 그리고 〈미녀는 괴로워〉나 옥주현이 잘 보여주듯이, 이 과정은 ‘인간 승리’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여성의 미모를 가다듬는 것이 ‘인간 승리’라는 보편적 범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남성 중심의 상징계에서 여성의 몫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언제나 그렇듯, 여성의 몫은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어머니’이다. 꿀벅지는 가냘픈 소녀시대의 허벅지에 재생산의 몫을 담당할 건강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첨가해서 탄생한 기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꿀벅지는 여성도 남성도 원하는 공통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 욕망은 바로 현재의 상징질서를 유지하고 ‘꿀’처럼 달콤한 욕망 이상을 원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아버지의 법에 충실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먹고사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것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태도와 꿀벅지 논란은 서로 겹쳐져 있다. 꿀벅지에 대한 성희롱 논란은 외모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긴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먹고사니즘과 결합한 꿀벅지 담론은 섹시한 젊은 여성의 건강미를 능력과 자질의 문제로 쉽게 치환할 수 있다.
외모가 자산이라는 합의가 꿀벅지라는 기표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태생적 자산은 시장에 속하면서 시장의 질서를 초월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자유를 부여해주는 매개이다. 태생적이지 않다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런 자산을 획득해야한다고 믿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를 이윤화하는 시장의 구조가 꿀벅지에 대한 열망을 가속화하고 있다. 꿀벅지를 마케팅 용어로 채택한 숱한 성형외과와 다이어트 담론들은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꿀벅지는 단순한 성희롱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의 주체를 고정시키는 정체성의 담론으로 강림하고 있는 것이다.
2009.10.1 ⓒ 이택광
이택광 :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대중문화와 사회 현상을 비평하는 글을 쓰고 있다. 지은책으로 『무례한 복음』『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으며, 옮긴책으로 《뉴레프트리뷰》(공역) 『프레드릭 제임슨: 맑스주의,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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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eoulrain's me2DAY | 2009/10/02 07:58 | DEL
꿀벅지는 성희롱인가? — 이택광 (via 온라인 당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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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dalcrose's me2DAY | 2009/10/03 00:27 | DEL
이택광, '꿀벅지는 성희롱인가?'. “이 글은 '꿀벅지를 성희롱으로 규정하는 비판이 왜 무기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via WALLFLOW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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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길래 몸이 착하다는 칭송을 듣는 걸까? 쉽게 말해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한다는 말이다.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러는 몸 말이다. 그냥 벗으란다고 벗는 미친 여자가 어디있겠냐며 따지고 싶다면, 좋다. 다짜고짜 벗으라는데 벗는 사람은 없지. 그러니까 SQ 딸리는 거 티나게 그런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 안 착한 년들 이런거 있지 않은가. 벗어 놓고도 말 잘 안 듣는 여자들. 진짜 짜증나는 년들 말이다. 아 쫌..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