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의생각] 2010/06/03 11:40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칼럼니스트
내가 젊었을 때 즐겨 읽었던 작가들 중에는 츠츠이 야스타카라는 SF소설가가 있다. 한국에서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9)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로 더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츠츠이는 그 외에도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나에 관한 소문>이나 <허인들>, <허항선단>을 비롯한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작가다. 또한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최근 출시된 에세이 <바보의 벽>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에세이스트로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번 달은 그런 츠츠이 야스타카가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 <사설박물지>를 서론으로 삼아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제목 그대로 여러 동식물의 기묘한 생태를 재미있게 소개하면서 인간 사회에 대해서 비평하는 그 에세이 안에서 츠츠이는 유대목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 나는 예를 들어 주머니늑대 등, 늑대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늑대의 동족임이 틀림없는 줄 알았다.(중략) 그러나 분류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중략) 주머니늑대는 제 아무리 늑대를 닮았다고 하더라도 늑대와 동족이 아니고 또 (중략) 주머니두더지가 아무리 두더지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눈이 퇴화되고, 구덩이를 파고 지하 생활을 하더라도, 두더지와는 동족이 아니라 역시 유대목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럼 어째서 유대목에 속하는 동물들 각자가 몇 진수아강(眞獸亞綱)에 이렇게 유사한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진화의 평행현상>이라 불리는 불가사의한 자연의 장난이다.(<사설박물지>마이니치(每日) 신문사 1976 165~167쪽, 고정수 옮김)
곧이어 츠츠이는 그 <진화의 평행현상>을 인간계에 적용시켜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부분은 이번 논고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략하기로 하고, 내가 윗 글을 인용한 이유는 그것이 일본의 문화적 다양성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예로 들어도 일본에서는 본격문학을 비롯해 미스터리, SF, 판타지, 시대 소설 등, 다양한 장르가 각각 일정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고, 또 같은 미스터리 중에서도 본격파, 사회파, 하드보일드, 경찰물, 철도 미스터리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런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이, 모두 외부(미스터리 소설의 경우에는 영국이나 미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차차 변해가고, 최종적으로는 일본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이다. 마치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다른 대륙과 분리되는 바람에 독자적으로 진화를 한 결과, 주머니늑대나 주머니두더지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둘 다 대륙과의 단절이 독자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 유대목에 대해서는 그 설명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일본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역시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을 참고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 제2장 <일본정신분석>에서 사상사가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생각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루야마는 고대부터 일본 사상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사상사에는 다양한 개별 사상의 좌표축을 형성하는 원리가 없고, 어떤 것을 이단으로 만드는 정통이 아니라 모든 외래 사상이 수용되고 공간적으로 잡거하며, 거기에 원리적인 대결이 없기 때문에 발전도 촉진도 없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일이 없이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보존되고 새로운 사상이 오면 갑자기 꺼내진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는 뭐든지 있게 된다.(<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70~71쪽)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것을 서양과 대비해서 고찰했지만, 중문학자이자 비평가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아시아 국가들과 대비하여 생각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 서양과 접촉했을 때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에서는 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이유가 일본에는 ‘저항’해야 할 ‘자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원리적인 좌표축이 있다는 것은 ‘발전’보다도 오히려(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정체’를 초래한다.(중략) 다시 말해 마루야마 마사오도 다케우치 요시미도, 일본에는 확고한 자기라든가 원리 같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뭔가 확고한 원리나 자기가 있다면 밖에서 들어온 것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깥에서 온 것이 정착한다면, 그때는 그것들이 ‘변조되었을’때 뿐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71~72쪽)
이런 식으로 일본에 있어서 다양한 것이 ‘잡거’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 다음에 가라타니 고진은 그 ‘변조하는 힘’이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최종적으로 일본에 독특한 표기 시스템, 즉 한자와 가나의 병용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아시다시피 일본어에서는 12세기 이후 한자와 가나(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섞인 글이 표준화되었는데 그 복잡한 표기 시스템이야말로 ‘아무것이나 받아들이지만 기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의 전통을 가능케 한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한자는 일본어 내부로 흡수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적인 것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자로 쓰인 것은 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중략) 외래어는 말해질 때는 외래어라는 사실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지만 쓰일 때는 가타카나가 외래성을 명시한다. (중략) 다시 말해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되는 한 외래적인 것의 외래성이 언제 어디까지나 보존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84쪽)
예컨대 한자나 가타카나로 수용된 것은 결국 외래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외래관념은 아무래도 한자나 가타카나로, 즉 표기에서 구별되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내면화되는 일도 없고 또 저항도 받지 않는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저 옆으로 치워질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는 외래적인 것이 모두 보존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85쪽)
가라타니 고진은 그렇게 199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의 사상에 있어서는 한자와 가나가 섞인 표기 시스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는데 그 후 2000년대에 그 논문을 책으로 간행했을 때 그런 표기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추가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정학(地政學)”인데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할 때 중국과 한국, 특히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아시다시피 일본 열도에는 옛날부터 수많은 종족이 도래해 살고 있었지만 군사적인 정복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걸 가지고 일본이 “신국”인 증거라는 망언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건 일본과 중국, 몽골, 또는 러시아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그곳에서 침입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이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국가의 윤곽을 작위적으로 유지하려고 했었던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자신의 윤곽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소비되지 않고, 또 밖에서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인 것들을 실용적으로 처리해 전통 규범의 힘에 매이지 않고 창조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이 지금 문화적 다양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한반도 덕분? 아무튼 일본의 문화적 독자성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걸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정학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2010. 6.1 ⓒ 고정수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자란 100% 일본인. 2000년 말에 영화 <쉬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5년 《씨네21》에 〈한 일본 사람 눈으로 보는 한국 영화〉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의 문화 번역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 웹진 《매거진t》에 〈나는 오사카 TV 오타쿠〉를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1년에 두세 번 한국에 여행을 간다. 한국을 방문하여 블로그에서 알게 된 분들과 친교를 맺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