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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혁 | 연세대 국문학 석사과정

텍스트비평▶『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서동진 지음, 돌베개, 2009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대개 사회의 결정적 구성부분으로 정치· 경제 · 문화와 같은 영역을 조명하면서 그 변전을 탐구하는 작업에 주력하는 가운데 그 안의 개인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름의 세대 구분을 첨부하는 정도의 방식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주목할 만한 연구서다. 한국 사회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 변동 과정을 조망하기 위해서라면 응당 사회를 정치나 경제와 같은 영역으로 절단하여 파악해야 한다는 현실 분석의 방법적 통념을 효과적으로 유보하는 동시에 ‘통치기술의 개별성'이라는 당대의 문제 영역을 정당하게 부각시키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는 쟁점들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통치 합리성과 자기계발하는 주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지난 20여 년간 겪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망하기 위해 사회를 가로지르는 일정한 사고양식을 추적하고 그것의 실천 형식인 주체(성)에 주목한다. 주체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대하고 또 세계를 대하는 방식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분석하여 그 효과로서 사회의 윤곽을 그려보려 하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로 ‘민주화'를 꼽으며 이러한 대의/관리 체제의 변화 과정을 국가와 사회의 관계 재설정이라는 측면에서 탐색하고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이라는 언표로 대표되는 자본의 유연화 전략이 여기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살피면서,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담보로 하는 새로운 주체(성) 형성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사회적 행위의 장 전반에 스며 흐르는 ’자기의 주체화'가 바로 오늘날 권력의 양상이자 테크놀로지, 즉 개별성을 겨냥하는 통치합리성이라는 것이다. 도처에서 목격되는 위태로운 삶의 광경들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처해야 할 공공적 안목은 부재하는 우리의 현실은 새로운 통치성이 활용하는 개별화 전략의 성공적 실현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은 새로이 형성된 주체성을 ‘자기계발하는 주체'라고 부르는데, 문면에 드러난 기본적인 책의 내용을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이라는 말로 비교적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기계발이라는 현상의 전면성에 매료되어 복잡하고 번다한 민주화 이후의 역사를 임의대로 마름질한 것은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여기에 기인한다. 가령 정신분석에서 원인이 증상이라는 종점으로부터 사후적으로 발견-첨가되는 과거인 것처럼, 지나온 20여 년간의 다방면의 변화가 현재 시간표상의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현상으로부터 회고적으로 찾아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그렇기에 도리어 괄목하다 할 수 있다. 해석에 앞서 해석을 예정하고 있는 실상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론 분석의 방법과 통치성 이론의 임계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작성하기 위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활용하고 있는 주된 접근 방법은 담론 분석이다. 현실이 담론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의 편에 서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제 · 사회 등의 현실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본래의 성질과 불변의 성분을 가진) 실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여러 이론적 통찰에 동의하면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다양하게 교차하는 사회적 실천의 장이며 그것들이 가시성을 얻는 과정은 언제나 담론적인 실천을 경유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동진이 수행한 것은 ’담론 분석'이지 ‘현실 분석'이 아니라며 과연 자기계발 ’담론'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결과'를 낳았는지 실제 검증이 필요하다는 어느 블로거의 투정은(http://blog.jinbo.net/marishin/?pid=323) 통치성 연구가 전반적으로 사례 연구에 소홀하다는 학계의 동향을 암시하는 의도치 않은 효과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가 읽어낸 것이 서동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해줄 뿐이다.

그와 달리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의 통치합리성이 생산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어떻게 ’투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반응들이다.(http://xenga.tistory.com/175, http://yhhan.tistory.com/1113) 그것은 우선 연구자가 참조한 이론의 현실적 임계점을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생정치와 통치성 개념을 벼려낸 소위 ‘자유주의 강의' 시절(1975~79)의 푸코나 그를 계승한 니콜라스 로즈 등의 영국 사회학자들의 연구가 그러한 것처럼 그들의 작업에 기댄 이 책의 논의 역시, 행동방식을 통솔하면서 개인의 인간형 자체를 변형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결절을 분석하는 데에는 기민하지만 그럴수록 현상황을 돌파할 출구를 사유하기가 어렵게 되는, 특유의 무기력성에 대한 비판에 직면한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계발 안의 자기계발 이상의 것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자유를 향한 욕망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말하는 이 책의 핵심적 통찰은 ‘투쟁'의 과제를 더욱 지난한 것으로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동진은 자기계발 안에 있는 자기계발 이상의 것, 우리가 자기계발을 욕망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자유에의 충동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한 ‘자기계발 주체'를 구성하는 주변의 사례를 상정해 보자. 이상화된 롤-모델의 앞선 걸음을 추격함으로써 혹은 유수한 기업이나 기구가 채택하고 있는 인재상을 자기화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가꾸려는 그/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역설적이다. 삶의 영역을 자신을 위해 부단히 새롭게 창조한다고 하는 자율성과 진정성 어느 이상에 비추어보더라도 그/그녀는 자유의 의지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그녀는 왜 자기를 관리하고 계발하는지 질문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는 자유를 사유하지 못하고 그들의 계발은 기왕 이상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기계발 담론은 개인의 삶을 책임성에 기초한 자기실현의 문제로 협소화하는 얼개로 개인의 자유의지를 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권력에 전유된 ‘사이비 자유'로부터 우리가 욕망하는 ‘진정한 자유'를 걸러내면 된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독자의 곤란이 있다.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민주화의 열망이 개인을 자기관리하는 주체로 만들려는 권력의 욕망과 겹쳐졌다는 일련의 분석에 이르면 소위 민주화-진보 세력이 견지한 그동안의 문제 설정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서동진의 귀띔이 들린다. 권위주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전체의 폭력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지만, 돌아온 것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급진적 행동에 족쇄를 채우고 개인의 자유를 내세워 모두를 포섭하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더 이상 그 자체로 공공의 선이 될 수 없다는 경고. 이 책이 독자들에게 알리는 가장 따끔한 지침이다.

그래서 독자는 우울하다. 아마도 이 책의 모체가 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온 뒤 그로부터 촉발된 몇몇 후속 연구들이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다른 면모로 ‘우울증을 앓는 주체’에 주목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급증하는 정신과 치료(이제 정신과는 더 이상 의대 비인기 전공이 아니다)나 각종 심신 클리닉, 온갖 테라피의 홍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모종의 불안을 감추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가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자기계발 담론으로부터 ‘내가 아닌 내가 되라는 명령'을 듣는 주체의 반응인 불안은 그런 면에서 윤리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나를 대하는 나의 태도(자아 정체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정념인 한편 주어진 내가 아닌 나 자신이 되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없는 듯 불안을 감추고 희망을 내미는 자기계발 담론의 기만적인 명령을 과감히 비껴들으며 불안을 차라리 절망에까지 밀어갈 수 있게 하는 한 줌의 용기야말로 ‘자기계발'에 들린 외톨이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친구를 찾아 광장으로 나오게 할 약호(code) 구실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봄직하다. 결국 ‘자기계발하는 주체'니 ‘투쟁하는 주체'니 하는 실타래를 푸는 해법도 일괴암(一怪巖)적 정체성 비교의 틈바구니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약호 변환을 모색하는 길 위에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2010.2.11 ⓒ 송인혁

송인혁: 전공 아니 학과 이름을 바꿔 대학원에 적을 걸어 두었지만 어디서나 ‘자기계발'은 심신을 즐겁게 하지 못할 과제였다. 딱 일용할 양식만 허락하는 요령을 얻는 대로 악몽 같은 편벽의 세계와 미련 없이 결별할 심산이지만, 씩씩할 수 있을지 언제나 그 점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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