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의생각] 2010/07/12 09:30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칼럼니스트
2010년 6월 2일. 한국에서는 지방선거가 한창이었던 바로 그날, 일본 정치계에서는 빅뉴스가 보도되어 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하토야마 총리의 사임 기자회견이 그것이었다. 지난해에는 정치자금 위장 문제를 둘러싸고 어머니한테서 9억 엔이나 “선물”을 받았었다는 것이 발각돼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품게 만들었던 데다가, 올해 들어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실수를 연발하면서 오키나와 현 주민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를 화나게 했다. 지난 해 총선 전에 미군 기지를 최악의 경우에도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기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지난해 9월 16일 국회에서 지명을 받은 지 266일 만에 사퇴를 함으로써 현행 헌법이 시행된 이래 6번째로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2006년에 5년에 걸쳐 장기 정권을 유지해왔던 고이즈미 총리가 “용퇴(勇退)”한 후에 취임한 세 명의 자민당에 속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타로 전 총리 3명이 모두 1년 정도의 단기 정권으로 끝나 버렸다. 사정은 각자 달랐지만 명확한 정책을 내세우지 못한 이유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 공통점이다. 이번 하토야마 총리 사임회견에서도 “국민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민의”의 의해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게 한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부러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런 식으로 “민의”에 따라 정권이 교체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이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민의”는 어디까지나 지금 살고 있는 이의 의견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에 있어서는 가라타니가 말하는 “미래의 타자” 즉, 아직 태어나지 않는 이에 대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는데, “민의”에 너무 많이 의지하면 지금 살고 있는 이의 이익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비참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다름 아니라 대의제의 위기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이번 사태도 결국에는 선거(국민투표)를 통하지 않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2003, 이매진, 송태욱 옮김.) 제 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 대표제의 최고 형태로 간주할 수 있는 보통선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대의제의 최고 형태라고 생각하는 보통선거에 의해 구성된 의회는 본래 의미의 ‘대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선출된 대표자는 자신들을 뽑아준 자에게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근대 의회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는 당선된 뒤 다른 정당으로 옮겨도 되고 정책을 바꿔도 된다. 왜냐하면 투표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그 사람에게 투표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치가가 자신들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또는 배신했다고 생각한다.(중략) 제한선거와 달리 보통선거는 아주 이상적인 대의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정치가의 그러한 행동은 대의제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164쪽.)
보통선거를 바라는 자는 보통선거로 민의가 더욱 잘 대표될 걸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의회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분출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의회가 쓸데없는 존재처럼 보이게 된다. 보통선거는 진정한 ‘대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통선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사람들은 진정한 대의제를 찾는다. 진실로 대표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166쪽.)
그 결과 진정한 대표를 찾는 사람들은 느릿느릿 논의만 하고 있는 의회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 독재 권력을 환영하기에 이른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민의”가 더 충실하게 대표되는 듯한 선거나 투표의 형태를 취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한다. 전에 이 칼럼에서 소개한 아즈마 히로키의 <민주주의2.0 (=전자 투표에 의한 정치 운영 시스템)>도 그런 방향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에는 다음과 같은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생각이다.
국민투표는 그런 시스템(=전자식 투표 시스템, 필자에 의한 주석)으로 간단하게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회(대의제)는 불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경우를 전자식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민의를 직접 또는 진실로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아주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애당초 ‘민의’란 무엇일까? 일반 사람들이 가진 의견은 사전에 정치가, 관료, 대중매체들에 의해 입력된 것이고, 자발적이라고 해도 그저 주어진 선택지에서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현재 대중매체가 실시하는 여론조사가 보여주듯이 국민투표의 결과는 끊임없이 부동(浮動)한다. (179쪽)
그런데 국민투표로 한 번 결정된 일은 간단하게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외국과 한 약속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국가로서 지니는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정한 것은 쉽게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의견을 바꾼 투표자들은 끊임없이 지금 자신들의 의견이 대표되고 있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더욱이 국민투표로 정한 결정이 실패로 끝난 경우, 누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들 자신이자 ‘민의’ 자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포기하고 판단과 결정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나 관료조직에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180쪽.)
다시 말해 일견 “민의”가 총리(대표자)를 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일본의 상황은 별로 환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적인 체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의 위험한 징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선거 제도는 없애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재 체제를 막을 수 있을까? 가라타니가 제창한 제비뽑기의 도입을 포함해 그것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자란 100% 일본인. 2000년 말에 영화 <쉬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5년 《씨네21》에 〈한 일본 사람 눈으로 보는 한국 영화〉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의 문화 번역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 웹진 《매거진t》에 〈나는 오사카 TV 오타쿠〉를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1년에 두세 번 한국에 여행을 간다. 한국을 방문하여 블로그에서 알게 된 분들과 친교를 맺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당비의생각] 2010/06/07 11:00
김신식 | 당비의 생각 간사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깨갱’모드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이 자만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시, 이번 선거의 주요 코드였던 ‘심판’이란 단어를 복기해보자. 적어도 투표에 참여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예쁜 자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머리말로 달았다. 자식들 다 고놈이 고놈이지만, 그나마 괜찮은 놈이 민주당이기에 찍었다는 원칙. 역사는 민주당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위 ‘반(反)의 정서’로 국민들이 도와준 경우가 몇 번인가를 세어보자. 아니 횟수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민주당이 ‘깨갱’할 때, 국민들이 투표로 도와줬던 그 순간의 농도를 측정할 때, 민주당이 처한 위기의 농도는 꽤 짙었다.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결과론적이다, 누구의 탓이다는 6.2 지방선거를 둘러싼 주요 ‘뒷담화’의 틈을 뒤집고 내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장면은, 민주당의 성배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는 민주당의 서울시장 경선후보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다. 이계안을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의 ‘아쉬운 패배’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가 촉구하는 것은 민주당의 어떤 태도이다. 앞에서 말한 ‘반(反)의 정서’로 대체 언제까지 일관할 것인가. 누군가는 플러스 - 마이너스, 영이라는 이 제로섬 게임의 틀을 깨야 한다. 나는 이 게임의 틀을 깨지 않는 한, 한나라당, 민주당에 대한 ‘도찐개찐론’을 여전히 철회할 마음이 없다.
심판론 앞에 초조해진 또 하나의 정당, 민주당
'MB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이계안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워낙 ’심판‘이라는 모토가 주는 준엄함 때문인지, 당의 결정을 따른 이계안의 태도에 대해 언론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요 프레임은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실 심판자 한명숙님이여!”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고봐라, 이명박과 오명박”으로 대동단결한 듯 했다. 심판이라는 정서가 주는 도전자 정신의 주입과 공유는 한명숙과 오세훈의 TV토론과 출구조사의 관련성에 대해 의외의 결과를 내놓았다. 한명숙은 생각보다 준비되지 않았고, 오세훈은 회가 거듭할수록 의기양양했다. 오히려 이 의기양양함으로 빚어진 마지막 TV토론에서의 오세훈의 태도는 분명 마이너스 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손실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출구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 한명숙이 TV토론에서 보인 어눌한 태도는 그리 중요한 감점 요인은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내가 잘 가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 점을 안심하고 있었다. “거 봐요, 뭐 TV 토론 사람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국민들의 안심과 정당의 안심은 달라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분명 ‘심판’이라는 모토를 잘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판을 ‘구성’할 줄만 알았지, ‘창작’할 여력은 역시 없었다는 걸 입증했다. 한명숙의 선전 뒤에 숨은 민주당의 불성실함을 우리가 애써 덮어줄 이유는 없다.
‘사람특별시’라는 이번 선거의 모토 안에서 기획된 공약들의 논리를 점검해보자. 공약의 논리를 관통하는 것은 철저히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반(反)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여러분, 오세훈식 행정이 이러저러 했습니다. 너무나 엉망이에요”에 주렁주렁 달린, 반대 이야기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의 논리. 상식적으로는 맞다. 근데 민주당은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내세운 분석안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은 했지만, 이 포장의 약발이 이번 선거뿐인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반대’를 넘어서, 그것에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식의 공약은 넘쳤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서울을 고민할 수 있는 공약은 빈곤했다. ‘반대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함으로써 국민들이 ‘그래도 이 친구들이 비교적 상황 판단을 잘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심리선에 적당하게 걸쳐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선거에도 국민들을 ‘헉!’하게 하는 민주당의 의외성은 없었다. 선거 준비를 정말 잘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또 한 번 국민들의 동정에 업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자는 이번 정부의 행보를 통해 정말 “‘운빨’ 장난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의 ‘운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민주당의 의외성이 돋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 특히 이계안과 한명숙의 경선 과정이다. ‘정권 심판’이라는 모토의 농도가 워낙 짙어, 대중들이 봐 준 측면도 있지만, 경선 과정에서 tv토론을 거부한 채, 여론조사 형식으로 후보를 추대한 일은, 민주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민주당은 후보 추대 과정에서, 사실 “우리에겐 한명숙 ‘씩이나’ 있다구!”를 외칠 정치적 전술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은 조급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물이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우리에겐 한명숙 ‘밖에’ 없다구!”였다. 물론 이 결핍과 빈곤의 절박함이 한명숙이라는 인물론을 돋보이게 한 건 유효했지만, 만약 ‘심판’이 그리 지배적인 테마가 아니었다면, (좀 더 세게 말해서, 이 ‘운빨의 코드’마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 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계안의 정책이 한명숙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가? 그것을 장담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몇 가지는 적어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봤을 땐, 민주당에서 경선 과정 안에 토론을 넣었더라도, 한명숙은 이계안을 이기고 후보가 되었을 게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를 없애고,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 절약의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토론을 통한 서울 시정에 대한 학습 효과였을 것이다. 이계안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생각, 한명숙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그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명숙이 나름 서울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민주당 이미지 전반에도 심판이라는 선거 전략과 더불어, 민주당이 현실 정치 안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민주당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전술 하나를 놓친 셈이다.
민주당마저 웃을 이유는 없어
다행히(?), 사람들은 적진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좀 모자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덮어 주었다. 그 안에 이계안도 들어가 있다. 그 또한 이 정서의 논리에 수긍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힘을 얻어, ‘중단’과 ‘촉구’의 정치적 수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래, 이러라고 뽑아준 것이다”라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이 시점이 민주당에게도 역풍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 징조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체감한다. 민주당이 야당으로 내세우는 그 ‘반(反)의 정서’가 남은 2년을 채운다면, 변덕 심한 대중들이 또 얼마든 다른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노무현 탄핵 이후 총선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들의 태도는 결국 자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절망했다. 그 절망이 지금 이 정부를 찍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뉴 민주당 플랜’이라는 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혹시 이게 위기 때만 쓰이는 민주당 스스로의 자위 기구가 아니길 부디 믿고 싶다.
결빙 효과를 깨야 한다
특히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단일화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진보정당을 ‘이상주의’로 매도했던 프레임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내 현실 정치를 구성하는 정당, 언론, 시민의 노력에 대한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게끔 만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라는 영화를 비평하는 진보주의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면 철이 지났거나, 너무나 생뚱맞다고 힐난한다. TV토론에서 노회찬이 오세훈의 입을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정작 표로 이어지지 않았던 현실이 아직 한국 사회의 진실이다. (많은 네티즌은 답답한 tv토론을 지켜보면서, 오세훈의 복지를 입만 살아 있는 ‘오랄 복지’라고 평가하면서도, 또한 노회찬의 ‘입만을’ 빌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백 분 토론>에 나오는 진보적 달변가와 한국 현실 정치에 뛰어든 그들이 다르다고 혹은 아직 모자라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덧씌운 편견이 아닐까. 우리는 정작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쾌락 앞에 그 현실이라는 ‘구성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먼저 타이르는 건 아닐까. 민주당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민주당 자체에 또 하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것으로 우리의 생각이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정치사회학에서 설명하는 ‘결빙 효과’를 깨기 위해선, 우리는 꾸준하게 진보 정당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 정당 스스로의 노력 또한 필요함은 물론이다.
2010. 6.6 ⓒ 김신식
김신식 : 당비의 생각 간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재학중이며,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빠돌이’다. ‘석사,박사’라는 해물떡국집을 개업해볼까 고민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오히려 한정식집으로 판을 더 크게 벌여볼까 궁리중이다. http://blog.aladdin.co.kr/717962125
[당비의생각] 2010/06/03 11:40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칼럼니스트
내가 젊었을 때 즐겨 읽었던 작가들 중에는 츠츠이 야스타카라는 SF소설가가 있다. 한국에서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9)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로 더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츠츠이는 그 외에도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나에 관한 소문>이나 <허인들>, <허항선단>을 비롯한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작가다. 또한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최근 출시된 에세이 <바보의 벽>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에세이스트로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번 달은 그런 츠츠이 야스타카가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 <사설박물지>를 서론으로 삼아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제목 그대로 여러 동식물의 기묘한 생태를 재미있게 소개하면서 인간 사회에 대해서 비평하는 그 에세이 안에서 츠츠이는 유대목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 나는 예를 들어 주머니늑대 등, 늑대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늑대의 동족임이 틀림없는 줄 알았다.(중략) 그러나 분류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중략) 주머니늑대는 제 아무리 늑대를 닮았다고 하더라도 늑대와 동족이 아니고 또 (중략) 주머니두더지가 아무리 두더지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눈이 퇴화되고, 구덩이를 파고 지하 생활을 하더라도, 두더지와는 동족이 아니라 역시 유대목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럼 어째서 유대목에 속하는 동물들 각자가 몇 진수아강(眞獸亞綱)에 이렇게 유사한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진화의 평행현상>이라 불리는 불가사의한 자연의 장난이다.(<사설박물지>마이니치(每日) 신문사 1976 165~167쪽, 고정수 옮김)
곧이어 츠츠이는 그 <진화의 평행현상>을 인간계에 적용시켜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부분은 이번 논고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략하기로 하고, 내가 윗 글을 인용한 이유는 그것이 일본의 문화적 다양성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예로 들어도 일본에서는 본격문학을 비롯해 미스터리, SF, 판타지, 시대 소설 등, 다양한 장르가 각각 일정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고, 또 같은 미스터리 중에서도 본격파, 사회파, 하드보일드, 경찰물, 철도 미스터리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런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이, 모두 외부(미스터리 소설의 경우에는 영국이나 미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차차 변해가고, 최종적으로는 일본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이다. 마치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다른 대륙과 분리되는 바람에 독자적으로 진화를 한 결과, 주머니늑대나 주머니두더지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둘 다 대륙과의 단절이 독자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 유대목에 대해서는 그 설명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일본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역시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을 참고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 제2장 <일본정신분석>에서 사상사가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생각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루야마는 고대부터 일본 사상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사상사에는 다양한 개별 사상의 좌표축을 형성하는 원리가 없고, 어떤 것을 이단으로 만드는 정통이 아니라 모든 외래 사상이 수용되고 공간적으로 잡거하며, 거기에 원리적인 대결이 없기 때문에 발전도 촉진도 없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일이 없이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보존되고 새로운 사상이 오면 갑자기 꺼내진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는 뭐든지 있게 된다.(<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70~71쪽)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것을 서양과 대비해서 고찰했지만, 중문학자이자 비평가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아시아 국가들과 대비하여 생각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 서양과 접촉했을 때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에서는 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이유가 일본에는 ‘저항’해야 할 ‘자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원리적인 좌표축이 있다는 것은 ‘발전’보다도 오히려(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정체’를 초래한다.(중략) 다시 말해 마루야마 마사오도 다케우치 요시미도, 일본에는 확고한 자기라든가 원리 같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뭔가 확고한 원리나 자기가 있다면 밖에서 들어온 것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깥에서 온 것이 정착한다면, 그때는 그것들이 ‘변조되었을’때 뿐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71~72쪽)
이런 식으로 일본에 있어서 다양한 것이 ‘잡거’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 다음에 가라타니 고진은 그 ‘변조하는 힘’이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최종적으로 일본에 독특한 표기 시스템, 즉 한자와 가나의 병용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아시다시피 일본어에서는 12세기 이후 한자와 가나(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섞인 글이 표준화되었는데 그 복잡한 표기 시스템이야말로 ‘아무것이나 받아들이지만 기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의 전통을 가능케 한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한자는 일본어 내부로 흡수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적인 것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자로 쓰인 것은 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중략) 외래어는 말해질 때는 외래어라는 사실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지만 쓰일 때는 가타카나가 외래성을 명시한다. (중략) 다시 말해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되는 한 외래적인 것의 외래성이 언제 어디까지나 보존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84쪽)
예컨대 한자나 가타카나로 수용된 것은 결국 외래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외래관념은 아무래도 한자나 가타카나로, 즉 표기에서 구별되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내면화되는 일도 없고 또 저항도 받지 않는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저 옆으로 치워질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는 외래적인 것이 모두 보존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의 기원>송태욱 옮김, 이매진, 85쪽)
가라타니 고진은 그렇게 199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의 사상에 있어서는 한자와 가나가 섞인 표기 시스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는데 그 후 2000년대에 그 논문을 책으로 간행했을 때 그런 표기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추가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정학(地政學)”인데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할 때 중국과 한국, 특히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아시다시피 일본 열도에는 옛날부터 수많은 종족이 도래해 살고 있었지만 군사적인 정복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걸 가지고 일본이 “신국”인 증거라는 망언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건 일본과 중국, 몽골, 또는 러시아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그곳에서 침입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이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국가의 윤곽을 작위적으로 유지하려고 했었던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자신의 윤곽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소비되지 않고, 또 밖에서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인 것들을 실용적으로 처리해 전통 규범의 힘에 매이지 않고 창조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이 지금 문화적 다양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한반도 덕분? 아무튼 일본의 문화적 독자성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걸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정학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2010. 6.1 ⓒ 고정수
고정수(다카이 오사무) :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자란 100% 일본인. 2000년 말에 영화 <쉬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5년 《씨네21》에 〈한 일본 사람 눈으로 보는 한국 영화〉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의 문화 번역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 웹진 《매거진t》에 〈나는 오사카 TV 오타쿠〉를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1년에 두세 번 한국에 여행을 간다. 한국을 방문하여 블로그에서 알게 된 분들과 친교를 맺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